활동소식

“내 이름은 울지 않는 ‘캔디’ 입니다”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10-15 13:55
조회
164
[나우가 만난 사람1]

“내 이름은 울지 않는 ‘캔디’ 입니다”


- 슈퍼맘 황씨의 좌충우돌 남한 표류기 -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 화창한 햇살이 비치는 날에 황혜윤(가명) 씨를 만났다. 운전은 언제 배웠는지 활짝 핀 웃음꽃을 지어 보이며 핑크색 소형차에서 내리던 황씨에게서 어딘가 모를 자신감과 약간의 수줍음이 교차했다. 전에 내가 보았던 황씨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그간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돌도 안 된 갓난아기를 안고 중국을 빠져나온 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가족도 지인도 하나 없는 이곳에서 첫 정착을 시작했을 때, 그 시간을 가득 채운 건 ‘두려움’과 ‘외로움’이었다. 새벽녘에 고열로 우는 아이를 안고 허둥지둥 밖을 나왔는데, 정작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자신도 아이처럼 주저앉아 울고 싶은 적도 있었다. 어른들도 버티기 힘든 한국행 과정에서 이유식 한번 제대로 먹지 못한 딸은 1년에 서너 번은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엄마니까, 버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이에 비례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우울증으로 이어졌고, 약이 없이는 몇 달간 집 밖을 나가지 못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놀랍게도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워킹 맘으로 당당하게 필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공공기관에서 탈북 여성들을 돕는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진 분들 옆에 있어줄 수 있음이 참 감사해요.”

해결점이 보이지 않던 그 시간을 탈출시켜 준 건 ‘선배 탈북자와의 상담’이었다. 지역 공공기관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선배 탈북자와 상담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그러던 중 그 기관에서 채용기회가 생겨 일할 기회도 얻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어린 딸을 무릎 위에서 재워가며 늦은 밤까지 컴퓨터 공부를 했고, 일할 수 있다면 하루 4-5시간 출퇴근도 마다하지 않고 다녔다. 황씨는 하나원을 퇴소하면서 어렴풋이 꿈이라는 걸 가졌었는데, 하나는 북에서 하지 못한 대학 공부였고 다른 하나는 공공기관에서 일해 보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인터넷으로 대학 강의를 들으며 이 두 가지 꿈을 모두 이루는 중이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직진하다 보면 그 위에 시간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어느덧 불가능해 보였던 길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그제서야 그녀 얼굴에 그늘이 걷히고 쨍쨍한 햇살이 비취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선택한 탈북이었다. 그것이 잘한 선택이었음을 그녀는 스스로 증명해 내고 싶었다. 독한 마음을 품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북한, 지금도 눈 감으면 엄마 냄새가 나는 청진 시내가 선명히 보이는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엄마를 잡을 수가 없다.

“얼마 전, 북한을 떠나온 지 7년 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었어요. 그 마저도 누가 녹음해 온 엄마 목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들어 본 거였어요… 아버지는 올 초에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녀 얼굴에 턱밑까지 차오르는 뭔가를 애써 눌러보려는 모습이 보였다. 가족은 물론 10년지기 친구들에게 조차 탈북의 기미를 보일 수 없었던 터라,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나온 것이 아직도 미안한 눈치였다. 어쩌면 그녀는 고향집을 떠나오던 그 날을 가슴 아프게 떠올리며 수많은 밤을 혼자서 눈물지었을 것이다.

“한국에 가면 혼자 버텨야 할 거라고만 생각했지 누가 내 이름을 기억하며 기다려 줄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한국행 과정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어느 여성분이었는데,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저와 아이가 아프지 않은지 묻고 힘을 내서 무사히 한국에 오라고 했어요. NAUH라는 단체라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저는 그곳이 무엇을 하는 데인지 몰랐어요.”

한국에 도착하면 브로커 비용을 지불하고 남은 돈을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후 여분의 돈으로딸과 함께 생활하려 했다. 그런데 하나원을 퇴소하기 3일 전 알게 된 놀라운 소식! NAUH라는 단체에서 자신의 구출비용 일체를 모두 지불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안전에 대한 얘기만 들었을 뿐 돈 얘기는 전혀 없었던 터라 눈치 채지 못했다. 수중에 10-20만원만 들고 정착을 시작할 뻔한 상황에서 200만원씩이나 하는 거금을 누가 대신 내 줬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큰 도움이었다.

“너무도 감사한 마음에 곧바로 NAUH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작고 허름한 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원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생수 한 병 사 먹을 돈도 아껴가며 구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써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어요.”

황씨에게 NAUH는 유일하게 그녀를 기다려 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우리의 인연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다. 그건 바로 자기 생명을 살려 준 후원자님들에 대한 감사였다.

“얼굴도 모르고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저희 모녀를 위해 후원해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었어요. 어디서 그렇게 선한 마음이 나올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워요. 정말 마음 깊이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생명을 살려준 이에 대한 감사함은 죽을 고비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그녀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 감사함은 단어 하나에 가둬 놓을 수 없는 굉장히 크고 깊고 진한 것이라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덧붙였다.

“북한인권을 망망한 바다라고 보았을 때, 저희에겐 그 바다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등대가 필요해요. NAUH는 지금도 충분히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봐요. 대한민국과 나아가 전세계에 북한인권을 알리고, 제3국에 계시는 탈북자분들이 무사히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등대의 역할을 해주시길 응원합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황혜윤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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